오피니언

남원을 먹여 살릴 김병종 미술관

최고관리자 0 111
김철성, 자유기고가
 
내 고향 남원에 지난 3월 2일 ‘우여곡절’ 끝에 <남원시립김병종미술관>(이하 김병종미술관)이 개관했다. 먼저 미술관명칭에 유감을 표한다. 글로벌 시대에 개인의 이름이 곧 브랜드다. 물론 김병종 교수(이하 김 교수)가 남원 출신이고 남원이라는 지역에 미술관이 건립되긴 했어도 김 교수의 역량이나 지명도는 이미 세계성(世界性)을 확보했다. 그러니 혁신정신을 살려 ‘남원시립’을 빼고 심플하게 ‘김병종미술관’이라 했으면 좋았었을 성싶다. 그랬다면 타 시립미술관의 명칭과도 차별되는 감각적 첫 사례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남원지역과 김 교수를 비교 우위 운운하는 것은 무지의 발상일 테다. 김병종미술관의 개관은 남원지역 뿐 아니라 우리나라 미술사에 굵은 획을 긋는 사건이자 경사다.
 

아직 김 교수와는 일면식도 없다. 다만 그림 애호가인 필자로서는 김 교수와 동향이라는 그 자체만으로도 너무 반갑고 기뻤다. 김 교수는 남원이 정든 고향이었기에 값으로 따질 수 없을 그 무한가치의 미술품 등을 선뜻 내주어 미술관을 조성하게 했다. 이제 남원에 가면 세계적인 거장인 김병종 교수의 원화를 직접 볼 수 있다는 그 사실이 꿈만 같다. 이런 반가움은 필자만의 감상만이 아닐 터다. 지역 언론(전북일보 6.6)은 개관 3개월 만에 8천여 명의 관람객이 다녀갔다고 보도했다. 또 다른 언론은 김병종미술관은 춘향전(춘향제)에 이은 남원의 두 번째 대표 문화 콘텐츠가 됐다고 밝혔다.
 
한 가지만 더 소개하자면, 경기대 오연석 교수는 ‘나는 남원시립김병종미술관이 자랑스럽다.’는 제하의 글에서, “일본에 가면 부러운 게 하나 있다. 조그마한 도시나 시골 어디를 가든 미술관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몇 년 전에 일본 유후인 온천마을을 방문했다. 거주하는 인구가 얼마 되지 않는 조그마한 마을에 품격이 느껴지는 마르크 샤갈 미술관을 발견했다. 유독 일본에 가면  편안하고 안정된 기분이 드는 게 비단 그들의 깨끗하고 친절함만이 아닌 품격 있는 문화에 있음을 느끼게 되었다. 이제 일본에서 느꼈던 안락과 환희를 이곳 남원에서 더 진하게 느껴본다. 나는 남원시립김병종미술관이 자랑스럽다.”고 관람소회를 밝혔다.
 
김병종미술관은 지난 2013년부터 올해(2018년)까지 근 5년여에 걸쳐 완성됐다. 그러나 서두에 밝혔듯이 안타까운 ‘우여곡절’이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김병종미술’을 담기에는 남원이라는 그릇이 작았던 것 같다. 아니다. 말은 바로 해야겠다. 남원이라는 지역의 그릇이 아니라 남원에 있는 근시안적 몇몇 인사들과 일부 정론직필을 망각한 언론의 추태라야 옳겠다. 미술관에 딴지를 걸었던 무지한 사연들을 접하자 문득 당나라 때 마조도일(709∼788) 선사의 시한 편이 떠올랐다.
 
“권군막환향(勸君莫還鄕) 환향도불성(還鄕道不成) 계변노파자(溪邊老婆子) 환아구시명(喚兒久時名), 그대들에게 권하노니 고향에는 가지 말라./고향에 돌아가면 체면이 서지 않는다./시냇가의 할머니가/어릴 때 내 이름을 자꾸 부르더라.” 마조는 30대 중반에 깨달음을 얻은 뒤 큰 스승이 돼 수많은 제자들과 고향(쓰촨성)을 방문했다. 그때 고향 할머니가 손가락으로 마조 스님을 가리키며 외쳤다. "어 마씨네 키쟁이 코흘리개가 지나가네."라고. 마조는 이 말을 듣고 제자들에게 말했다. "출가해 나이 들어서 고향에 가지 말라."고. 어찌 마조 뿐이랴. 우리의 잘생긴 예수도 고향 나사렛에서 질시당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익히 아는 얘기지만 사실 김 교수의 작품을 탐낸 강원도와 경기도에서 미술관 조성과 기타 부가가치의 대우를 조건으로 김 교수를 모시려 했다. 허나 전북도(남원)의 간청으로 고향으로 오게 됐다. 그러니 우리는 반성해야 한다. 모신 후에 어떻게 대접을 했는가를 말이다. 또 있다. 아무리 미술품을 무상으로 기증받아 미술관을 개관했다 하드라도 통상 기증 작품의 가액을 평가하여 가액의 10~20% 범위 안에서 기증사례비를 줘야 옳지 않을까. 고향이 남원인 필자로서 김 교수에 대해 감사하고 죄송하다는 마음이 교차한다. 감사함이 고향에 김병종미술관을 선물해준 것이라면, 죄송함은 몇몇 우매한 인사들의 속 좁은 행태 때문이다.
 
이제 시작이다. 어찌됐든 남원에-절대 과장이나 과찬이 아니다-엄청난 미술관이 들어섰다. 그 이유는 김병종 이름 석 자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제 김병종 미술품 등을 차근차근 정리를 하면서 계통별로 체계를 세워야 한다. 즉 콘텐츠 화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는 말이다. 콘텐츠 작업을 통해 유형의 문화관광 관련 상품으로 거듭 개화해야 한다. 외국의 유명미술관의 사례를 빌리지 않더라도, 거칠게 말하자면 김병종미술관이 남원을 먹여 살린다는 말이 나올 것이다. 그러니 남원에서는, “고향 할머니가 손가락으로 마조 스님을 가리키며 ‘어 마씨네 키쟁이 코흘리개’가 지나가네”가 아니라. 진심으로 김 교수를 귀히 모셔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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